유성구 문화재7

유성구 문화재7 소개

안녕하세요.
유성호빠입니다.

오늘 유성호빠와 함께 유성구 문화재중 소문산성, 성북동산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성구 문화재7

소문산성

  •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기념물
  • 소재지 : 대전 유성구 신동 산13번지
  • 지정일 : 1991-07-10

상세소개

유성에서 구즉을 거쳐 연기군 금남면 쪽으로 가다보면 대전시와 연기군의 경계지역인 유성구 신동이 나온다.
신동 속골부락의 북쪽해발 200m의 산 정상에 있는 산성이 소문산성이다. 산의 높이는 낮지만 인근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굽이쳐 흐르는 금강본류 지역을 지키는데 무리가 없었을 것으로 본다.

소문산성은 백제시대의 대표적 축성법인 테뫼식으로 쌓았다. 성의 평면형은 거의 원형에 가깝고 성의 둘레는 약 350m
정도로 테뫼식 산성 중에서는 비교적 소규모이다.

성벽안쪽에 5~10m의 평탄지가 있으며, 성벽의 바깥쪽 높이는 5m내외로 추정된다. . 성벽의 윗부분에는 석재일부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돌을 쌓아 성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벽과 남벽의 파괴된부분에서 1~4단의 석축 하부가 순수 토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다는 것이 확인된다. 즉 흙으로 쌓았던 곳에 나중에 돌을 쌓아서 성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에는 2개소의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남문지폭은 약 4m, 동문지의 폭은 약 3m정도이다.
성내에는 평탄한 대지가 거의 없고, 동쪽벽 가까운 곳의 정상부에 원형 샘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성내에서는 삼국시대때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들이 수습되고 있다.

이산성은 대전쪽에서 내려오는 갑천지역과 신탄진을 지나온 금강본류 지역을 지키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대의 육로와 수로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고, 인근의 적오산성, 안산산성 등과도 연계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북동산성

  •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기념물
  • 소재지 : 대전 유성구 성북동 산20-5번지
  • 지정일 : 1990-05-28

상세소개

원내동에서 교촌동을 지나 산길을 따라 성북동 윗잣뒤 동네쪽으로 넘어가다 보면 성재고개의 남쪽에 산성의 흔적이
나타난다. 이산성이 성북산성이다.

표고 230m에 위치한 이산성의 형태는 테뫼식이다. 돌로 쌓은 이산성의 둘레는 약 450m 정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석축은 무너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며, 북벽의 일부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문지는 동북벽의 모퉁이에 위치하여 산의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곳과 그리고 북벽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 있다.
동벽과 남벽은 모두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삭토의 방법으로 조성하였으나 지금은 확인하기 힘들정도로 파괴되었다.
성안에서는 격자무늬, 파상무늬등을 새겨 넣은 경질토기와 기와 파편등이 수습되고 있다.

이성은 7세기 전까지는 두량이성, 주류성, 지라성, 두릉윤성으로 불리우며, 백제의 중요한 산성중의 하나였었다는 학설이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또 15-16세기에 와서는 『산장산성』으로 불리워졌고, 오늘날에 이부근을 『산정이재』, 『성재』로 부르고 있다.

성북산성은 규모, 출토유물, 인문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백제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전과 부여지역을 잇는
주요 교통로의 인근에 위치해 있어 대전동부지역의 다른산성과도 중요한 연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느때 부터인지 성안에 분묘가 하나 둘씩 생겨나 산성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예 무연고자들의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이는 허술한 상태로 방치되어 온데다가 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
때문에 산성 곳곳이 파괴돼 원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출처 유성구문화관광

유성구 문화재7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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