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구 문화재4 소개
안녕하세요.
유성호빠입니다.
오늘 유성호빠와 함께 유성구 문화재중 악기장, 칠성당지석묘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성구 문화재4
악기장(북메우기)

-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 소재지 : 대전 유성구 엑스포로295번길 10
- 지정일 : 2002-12-30
상세소개
북은 가죽을 통의 마구리에 메워서 이를 두드려 소리가 울리도록 만든 공명을 이용한 타악기로, 각종 의식과 전쟁의
진퇴를 알리는 신호를 위시하여 민속놀이, 창, 무용, 무속에서의 무구 등 다양하게 쓰여 왔다.
북은 통에 씌우는 가죽작업과 북통제작 등 크게 두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오동, 육송, 미송, 피나무, 박달나무를 주로
사용하는 북통은 통나무를 파서 만드는 통통과 같은 크기의 쪽나무를 여러 쪽 붙여서 만드는 쪽통이 있다. 나무를 길이에
맞게 토막을 낸 후 목심부터 쪼아가면서 파 들어가 안쪽을 깎아 관통시켜 통통을 만드나, 굵은 통목을 구하기 어려워 주로
쪽통을 제작한다. 가죽은 질과 두께, 부위에 따라 소리가 좌우되는데 짐승의 원피(原皮)를 가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털
제거를 위해 석회물에 담그거나 기름기 제거를 위해 닭똥 혹은 된장물에 담그는 작업과 함께 대패질로 알맞은 두께로 만드는
무두질 작업을 거쳐야 한다.
김관식은 충남 논산시 채운면에서 30여 년 간 북을 제작해온 조부와 대전으로 옮겨 50여 년 간 북을 제작한 아버지를 이어
3대째 북메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북소리를 좌우하는 가죽의 선별과 가죽 처리 및 통제작 등 재래식 방법에 의한 가공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작품과 상품을 구분 제작하는 능력을 지닌 장인이다. 주제작 품목은 줄북(쐐기북), 고장북(시조,
판소리용), 밀양북(무속인용)등이지만 다른 종류의 다양한 북도 제작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 개막식에 사용한 용고와
청와대 춘추관 고각의 용고 등은 그가 제작한 북이다.
1989년 서울 올림픽대회 개회식에 사용한 용고와 청와대 춘추관 고각의 용고 등은 그가 제작한 북이다.
약력
- 1987 대전시청 ‘신문고’
- 1988 ’88 서울올림픽 용고 제작
-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표창장 감사패, 용고기증
- 1989 대전시 공예품 경진대회 출품작 ‘좌고’ 금상 수상
- 1991 청와대 춘추관 용고
- 1992 통일전망대 ‘통일 기원의 북’
- 1993 ’93 대전엑스포 용고
- 1998 건군 50주년 기념 ‘전진의 북’
- 2002 2002년 월드컵 필승기원 대북제작 (8강전 응원에 사용)
- 2002. 12. 30 대전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북메우기) 보유자인정
- 2008 국군의 날 60주년 북 제작
- 2009 한국과학기술원(KAIST) 졸업식 용고 제작
<출처 대전무형문화재전수회관>
칠성당지석묘군

-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군 교촌동 산7-1
- 지정일 : 1992-07-22
상세소개
유성에서 진잠쪽으로 가다보면 도로변 우측에 마을이 나타난다. 자그마한 들을 바라보고 야산을 뒤로한 마을이
칠성댕이(칠설당)로 불리 우는 교촌동 3통이다. 이 마을 뒷산에는 7개의 바위가 놓여 있다. 표고 70m의 낮은 야산에 위치해
있는 이 바위들이 칠성당 지석묘이다.
7기의 지석묘는 15 * 20m의 지역 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지석묘들의 길이는 적은 것은 1m정도, 큰 것은 7m정도로
다양하다. 주변은 소나무들이 들어차 있다. 마치 소규모 공원에 커다란 의자를 마련해 놓고 휴식처를 조성해 놓은 것처럼
아담한 풍경이다.
몇 개의 돌을 아래에 놓고 그위에 큰 돌을 올려놓은 남방식 계통의 이 지석묘들 중 일부는 지석이 지상에 노출돼 있다.
이 지석묘군은 반경 2~3km안에 있는 원내동 및 대정동 일원의 지석묘들과 연계해볼 때 우리지역의 청동기 시대 묘제 및
문화양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한편 이 지석묘군 과 그에 관련되 전설에서 “칠성댕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옛날에 아기를 못 낳는 한 여인이 이산에
올라갔다 북두칠성의 형상을 한 7개의 바위들을 발견한 이 여인은 바위 앞에 엎드려 백일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들
낳기를 빌었다. 얼마후에 이 여인은 아들을 낳아 소원성취를 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들이 대단한 영험을 지닌 것으로 믿게 됐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이 바위들을 칠성바위라고
불렀으며 마을 이름을 자연스럽게 칠성댕이로 불리워지게 됐다. 또 주민들은 칠성바위를 대상으로 당제를 지내며 해마다
마을의 무사태평과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다.
출처 유성구문화관광
유성구 문화재4 소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