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구 문화재2 소개
안녕하세요.
유성호빠입니다.
오늘 유성호빠와 함께 유성구의 수운교도솔천, 진잠향교대성전, 숭현 서원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성구 문화재2
수운교도솔천

-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 소재지 : 대전 유성구 자운로245번길 80
- 지정일 : 1999-05-26
상세소개
유성구 추목동에 위치해 있는 수운교 천단은 1929년 4월 15일에 창건된 목조건물이다. 이 건물은 경북궁을 지은 최원식에
의해 건축되었다.
천단의 건립에 동원된 건축술은 조선시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천단 건물(도솔천)과 광덕문(출입문),
육각으로 지은 종각 등 3동으로 되어 있다.
수운교의 상징적 존재인 천단은 단순하게 꾸며진 정원 안의 높은 단위에 위치해 있다. 정원주변에는 야트막한 담이 둘러쳐져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문이 나 있다. 정면에 있는 제일 큰 문이 광덕문이다.
57평 규모의 천단 건물에는 12마리의 큰 용과 44마리의 작은 용, 88개 봉화산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북벽에 안월성신 조각과 동쪽에는 금강탑, 서쪽에는 무량수탑이 각각 목조 6층으로 금박되어 있다. 또 4면에 불보살·선관·성군·사천왕 조각이
있으며 서벽에는 동진보살의 탱화를 배치해 종교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또 문살에 조각된 도깨비문양과 처마밑의
오색단청은 사찰건물과 많이 닮았다.
지붕에는 궁궐과 왕실 건축물 등에만 이용하던 2지신상을 배치해 이 건물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다.
이곳 주변에는 한 때 큰 동네가 많았으나 6.20사업으로 모두 이전했다.
수운교 천단을 비롯한 다른 건물도 6.20사업 당시 다른곳으로 이전될 위기에 처했으나 신도들의 노력으로 현재 자리에 남게
됐다.
천단은 건물 자체 뿐 아니라 주변 경치도 수려한데 병풍을 두른 듯한 금병산과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면 이곳 저곳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진잠향교대성전

-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 소재지 : 대전 유성구 교촌로 67
- 지정일 : 1989-03-18
상세소개
조선시대에 유교이념은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 시켜온 근간이었다. 이러한 유교이념을 교육시키고 유림들의 정신적
지주로 버텨온 것이 향교이다.
특히 유학의 고장으로 이름높던 충청도에서 회덕 향교와 함께 대전 인근 유학의 산실이 되온 곳이 진잠 향교이다.
조선 태종5년(1405)에 창건된 진잠 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양재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 안쪽의 양옆에
동서양재가 서로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고 안쪽에 학문을 가르치던 명륜당이 자리 잡았다.
또 명륜당 뒤로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면 높은 대지에 대성전이 위치하고 있다. 이중 대성전은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는데 단아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느끼게 한다.
평면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으로 돼 있다. 명륜당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대청을 만들었으며
우측 1칸은 온돌방으로 설치됐다. 지붕은 흩치마 8작 지붕으로 뒤쪽 대성전의 지붕 및 앞쪽 외삼문의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외삼문 안 양쪽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흩처마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잠향교의 건물들은 수차례 고쳐져 원형을 잃은 부분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한편 진잠향교의 입구의 홍살문이 설치되어
있고, 하마비(下馬碑)도 세워져 있어 조선시대 진잠 향교의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또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향교 바로 앞에 수 백년 느티나무가 서 있어 향교의 위용을 더해줬으나 어린 학생들의 불장난에
의해 불에 탔다.
유성구 문화재2 숭현 서원지

- 지정번호대전광역시 기념물
- 소재지대전 유성구 엑스포로251번길 36
- 지정일1992-07-22
상세소개
원촌동은 보통 『서원말』이라고 불리운다. 이는 이곳에 숭현서원이 있었던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숭현서원의 전신은 회덕의
충절지사인 김정, 정광필, 송인수 등 세분의 명현을 모시는 사우였다.
이 사우는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시기가 가장 늦은 송인수가 을사사화의 여파로 명종2년(1547)에
서거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16세기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우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09년에 송남수가
유생들과 함께 다시 건립해 삼현서원이라 이름지었고, 같은 해 조정에 청원해『숭현』이라 사액 되었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 의해 이 서원도 헐려서 묘정비만 남았다. 이 묘정비는 신흠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숭현서원에는 모두 여덟 분의 유학자들이 모셔져 있어 『팔현모』라고도 불리는데 맨 처음 배향된 세분을 비롯 1641년에는
죽창 이시직 과 야은 송시영 두 분이 서원안의 별사에 배향되었다.
그후 예론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을 비롯 유림의 두 거봉인 동춘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 배향되었다. 이서원에서는 송남수,
송시열, 송준길, 등 거유들이 학문을 강의하는등 이 지역 학문중심지역 역할을 했다.
대전시는 이처럼 유서 깊고 교육적 가치가 높은 유적을 보다 많은 시민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94년부터
복원을 하여 사당, 강당, 동제, 서제 등이 완전히 갖추어진 숭현서원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유림회관과 더불어 선조들의
충절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 되고 있다.
출처 유성구문화관광
유성구 문화재2 소개 끝